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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봉(六峰)우용택의 진충갈력(盡忠竭力)의 용맹함
육봉(六峰)우용택의 진충갈력(盡忠竭力)의 용맹함
  • 경북중앙뉴스
  • 승인 2018.03.0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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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 박금숙

우리 의성은 여러 부분에서 볼 때 義와 禮를 빼놓고 말 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조선 후기 의성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위상을 볼때면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의성의 독립운동이 한국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추세와 대동소이한 점을 가지면서도 지역적 독특한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는 말이다.

보편성을 보면 의병항쟁에서부터 시작한 점과 그런 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해 해방을 맞을 때까지 계속적으로 펼쳐나갔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주로 유림을 통한 전통적인 지배계급이 주도하였으나 뒤로 갈수록 농민, 기독교인, 새로운 가치 관념을 가진 인물과 집단에 의해 추진되어 갔다는 점이 그러하다.

특수성으로는 의성이 인구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은 수의 독립운동유공자를 배출한 부분이다. 국가보훈처의 자료에 의하면 의성인의 독립유공자로 훈장과 표창을 받은 인물은 170여 명이나 된다. 경북에서 안동과 영덕 다음으로 많은 수치이며, 군 단위로 비교하면 전국에서 100여명을 넘는 곳은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의병항쟁과 3⦁1운동에 집중되었다고 볼 때 의병항쟁은 동부지역의 산악지역이 주된 전투지역이 되었고, 3⦁1운동은 서부지역이 동부지역보다 더 세게 일어났다. 이는 새로 들어온 기독교회가 중심 역할을 맡았는데, 기반이 단단한 서부지역이 확산제가 되었다고 본다. 또한 비교적 늦게 일어난 연합의진을 구성하여 전투를 치른 부분이 기폭제가 되었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이러한 독립운동 흐름은 전후기로 보면 전통적인 유림세력에 의해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유교문화권의 특성을 보이다가, 점차 열강의 침략과정에서 유입된 기독교가 터를 잡으면서 항일투쟁에 나서는 과정을 거쳤다고 보는 부분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서부지역의 근현대 부분에서의 항일의병투쟁, 독립투쟁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우용택(禹龍澤:1868~1940)을 꼽을 수 있다.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출신인 우용택은 자는 재현(在見), 호는 육봉(六峰)이다. 한말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친일 매국노를 찾아가 강개지사(慷慨之士)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고종은 그의 의로운 행실을 듣고 참봉(參奉)을 제수하였다.

선생은 1904년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도발한 다음 제1차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는 침략 행위를 강화하자, 서울에서 김천 출신인 김삼의진의 남은 여중룡(呂中龍)과 왕산 허위(許蔿) 운강 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충의사(忠義社)를 결성하였다.

특히 허위선생은 전국 의병의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창설하는데 참여하여 온 힘을 다하기도 했다. 석주 이상룡의 손부 며느리인 허은과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과는 집안간으로 집안 모두가 독립운동가로 뭉쳐진 가문이다. 이러한 허위선생을 안중근의사는 평하기를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 선생과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함)의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굴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언급하였던 바 그의 기개가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충의사는 황실(皇室)의 강녕(康寧), 민명(民命)의 보호, 군제의 초연(抄鍊), 인재의 교육 등 현재 빨리 처리해야 할 일에 힘을 써 자강지책(自强之策)을 강구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을사조약 전후로 충의사는 배일 언론 투쟁을 적극 전개하였다. 선생은 여중룡·이병구·강원형 등 유생들과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공개서한을 각국 공사관에 발송하고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규탄하다 1905년 5월 헌병대에 체포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육봉 선생의 활동을 기록해 전해 오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禹龍澤

禹龍澤者, 丹陽人, 自比安移居善山之海枰里, 初, 母金氏夢龍, 故名龍澤, 爲人魁梧傑傲, 相與語, 人多畏之, 太皇朝除參奉.

乙巳秋九月, 龍澤遊漠城, 聞外部大臣李夏榮, 許日使林權助請內地河川航行之權, 往夏榮 數之曰, 汝以東萊賤坐, 身爲大臣, 無小報效, 但賣國不已, 以至賣內地河川, 又將賣何 物乎, 遂握拳批顂而去, 後, 家爲海面長. 時, ... ...

우용택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비안(比安)에서 선산(善山) 해평리로 이주하였다. 처음에 어머니 김씨가 용꿈을 꾸었기에 이름을 용택이라 하였다. 체구가 크고 건장하며 재주가 뛰어나 우용택과 말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경외하였다. 태황조에 ... ...』

뒤 내용을 더 주목하면 외부 대신 이하영이 1905년 연해하천항행무역권(沿海河川航行貿易權)을 일제에 양도한 사실에 분노하여, 이하영을 찾아가 ‘너의 매국 행위는 끝날 줄을 모르더니 이제는 하천까지 팔아 먹고 장차는 또 무엇을 일본 놈에게 팔 작정인가? 이 역적놈아.’ 하고는 빰을 후려갈기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한동안 되풀이 되는 고초를 겪었지만 친일 매국노를 따끔하게 혼내 준 강개지사(慷慨之士)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기려수필의 저자 송상도(宋相燾:1871~1946)는 영주 출신의 유학자로 본관은 야성. 자는 성소, 호는 기려자·미헌·연파이다. 기려자로 자호한 이유도 중국 명나라의 기려도사(騎驢道士)가 명이 청에 망한 뒤 명말 충신들의 행적을 모았던 예에 따른 것이라 한다. 기려자는몸으로 역사를 실천한 분이라 할 만큼 수십 년간 항일 운동가들의 유가족과 친지를 찾아다니면서 사적을 모아서 기록하고, 신문 등 사건 당시의 자료를 수집해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몸소 다니며 기록한 책 속에 육봉선생의 내용이 담겨 있다니 자랑이 아닐 수 없다.

1907년 육봉은 여중룡·이병구·지우석 등과 일본 공사관을 폭파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구금되어 8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출옥 후 고종황제 강제퇴위 반대운동을 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논설을 실은 장지연(張志淵)과 오경석(吳慶錫)의 장남인 오세창(吳世昌)이 설립한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입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 등 힘겨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追敍)되었다.

경북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 가운데에서 義城, 義城人의 자부심이 바로 나라사랑의 길인 개인을 넘어 우리를 구한다는 일념으로 항일운동, 독립운동으로 선열들의 뜻을 계승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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