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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동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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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가끔 해 질 녘이면 어릴 때 자랐던 시골의 초가에 굴뚝에서 모락로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립다.
배고프고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볼 수 없는 현실 앞에 진한 향수의 기억으로 그립게 연기처럼 떠 오른다. 그래서 찾은 곳이 민속마을이다.
전국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2010년에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크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대부분 마을 전체를 ‘민속마을’로 지정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원형 자체를 잘 보존, 관리하여 후손에 역사와 문화를 잘 물려주어야 겠다.
아래 우리나라 8곳의 국가민속문화재 마을마다의 특징을 살펴보면
-. 우리나라 최대 규모/ 경주 양동마을(경북)
-. 하회별신굿탈놀이/ 안동 하회마을(경북)
-. 600여 년의 역사와 제주의 옛 모습/ 성읍 민속마을(제주)
-. 국내유일의 북방식 가옥/ 고성 왕곡마을(강원)
-. 상류, 중류, 서민가옥이 함께 잔존/ 아산 외암마을(충남)
-. 돌담과 초가지붕이 아름다운/ 성주 한개마을(경북)
-. 350년의 역사와 외나무다리/ 영주 무섬마을(경북)
-. 동해안 전통가옥의 특징인 뜰집/ 영덕 괴시마을(경북)로서 이 중 5곳이 경북에 소제해 있다.
[양동마을이 한국의 씨족 마을을 대표하는 이유]-
1. 한국의 씨족 마을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개척 입향과 처가입향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2. 전통적인 풍수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으며, 강가 입지와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이고 우수한 사례이다.
3. 생산 영역, 생활 영역, 의식 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 마을의 전통적인 공간 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4. 조선 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5.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고문헌과 예술 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 외 특징적인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례이다.
양동마을은 1984년 12월 20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 제189호(969,119㎡)로 지정되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경주손 씨와 여강(여주)이 씨 종가가 500여 년 동안 전통을 잇는 유서 깊은 반촌 마을이다.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특이하게 손(孫), 이(李)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문화 보존 및 볼거리, 역사적인 내용 등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마을이다.
전국에 8개소의 전통민속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 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도 이곳을 방문했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경주손 씨와 여강(여주)이 씨의 양 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우재 손중돈선생, 회재 이언적선생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 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 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수백 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 협주명현 십 초시(보물 1926호), 지정조격(보물 2118호)을 비롯하여 송첨(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유물전시관]- 조선조 오백여 년을 이어온 전통적 반촌(班村) 마을인 양동마을 소장 문화유산을 한곳에 모아 관리하기 위해 양동마을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다.양동마을 내 귀중한 문화유산을 과학적으로 보존 관리함으로써 문화재 훼손과 도난을 사전에 예방함은 물론 흩어진 유물을 한곳에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공개함으로써 관광자원화 및 역사문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유물전시관 내부구조를 보면 전시실 177평, 마을회관 51평, 관리동 108평, 편의시설 65평, 기타 181평으로 건립.
[역사와 유래]- 양동마을이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청동기 시대 묘제의 하나인 석관묘가 마을의 안산인 성주산 정상의 구릉지에 100 여기나 있었으나 고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BC 4C 이전)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고려에서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 씨(吳氏). 아산 장 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주이 씨( 驪州 또는 驪江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 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 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 선생이 배출되면서 손 씨, 이 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며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실제 남자가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 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의 분위기는 와가와 초가 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며 전통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아름다운 풍경과 낮은 토담길 사이를 걸으며 긴 역사의 향기를 넉넉하게 감상할 수 있다. 유교 전통문화와 관습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이 있어 아름다운 우리 예절과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고 마을식당은 고향의 미각을 추억하게 한다.
[출처]https://yangdongvillage.or.kr/ko/
경북중앙뉴스_편집위원/기자_최상철중앙뉴스=경북중앙뉴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