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경주역사를 접하게 된 건 경주도뀨호텔 근무 시절 5년간 틈틈이 유적지를 다녔고 호텔 관광 가이드이셨던 방경환 선생님의 자료에 많은 도움과 삼부토건의 도뀨호텔 야심작 “신라민속촌” 프로젝트에 연구원으로 선발되어 장재규 기획실장님으로부터 다양한 견문을 넓혔고 당시 경주일요화가회와 경북창작미술협회에서의 활동에 지역 작가 회원들로부터 폭넓은 안목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필자가 관련한 인연을 정리하여 열거해 본다.
_ 경주도뀨호텔의 교양프로그램 "경주역사교실"에서 윤경렬 선생님의 강의에 매료되었다. 경주의 향토사학자로서 인자하시고 박학다식한 분이시며 선생님의 웃으시는 모습은 신라인의 미소를 담고 있어 지금도 생생하다. 저서에는 ”겨례의 땅 부처님 땅“ ”경주남산(1. 2편)“ “경주남산 고적순례“ ”경주남산의 탑골”등 남산에 관련한 책을 저술하셨다.
_ 40년 전쯤에 사진작가이신 강운구 작가님이 조선일보에 경주 남산의 유적을 사진과 글을 오래 동안 연재하여 소개하였고, 저서에는 “경주남산(사진집)”이 있다.
_ 1990년대에 대구매일신문에서도 특집으로 여러 번 특별취재를 하였고
_ 매일신문사에서 2020년에 발간한 "신라 왕의 길" (경주 남산을 걷다)에서는 6명의 집필자들의 섬세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신라의 시작과 찬란한 남산의 유적들을 상세한 답사 코스와 골짜기마다 특성의 아울러 아름다운 신라를 펼쳐 보인다.
_ 유홍준 교수님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994년 발행본의 표지에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늠름하게 뽐내며 꿋꿋이 서 있고, 내용에는 책을 펴 내면서의 서두에서는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에서는 남도답사를 비롯해서 (경주 선덕여왕과 삼화령 애기부처)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에밀레종의 신화와 신화) 이 외 경주의 유적지를 상세하고 알기 쉽게 풀어내어 누구나 호감을 갖게 하는 마법의 책이기도 하다. 신라를 이토록 여러 유물과 생성과정과 찬란함을 소개하여 우리가 간직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으며 행복한 감동과 전통의 가치를 알게 되어 기쁘다.
_ 서울신문과 영남일보 문화부 기자로 지낸 남윤호 님의 "나를 사로잡은 천년의 울림" (우리의 美를 찾아서)에는 고고학적, 미술사적으로도 깊은 역사의 품을 우리에게 포근히 안겨준다.
경주와 경북의 문화유적지와 문화재들을 소개하였으며, 이 책 외 네 권의 한국전통의 미를 찾는 책을 출간하였고 경주에서 나고 자랐으며 경북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대구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과정을 늦깎이로 마친 열정적인 작가님이다.
윤경렬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경주의 담소를 나누고 나누니 정겨움에 마치 신라시대로 돌아간 듯 시간 가는 줄 몰랐다.
_ 영남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이자 경주최 씨 광정공파 종친회장을 역임하신 최상희 님은 금융인이자 문인이며 서예가이셨다. 팔순에 집필한 "상산만록"(常山漫錄)에는 선현들의 발자취와 동방의 명현들의 소개를 비롯하여 역사의 중요한 최치원 선생의 기록과 경주최 씨의 계보와 경주 최부자집 300년부의 비밀을 소상히 기록하여 전통문화를 계승코져 하였다.
- 대구시사(大邱市史)』(대구시사편찬위원회·대구광역시, 1995) 손필헌 선생님은 대구문화원 사무국장 재임당시 1998년 “대구이야기”의 일본어 원제를 번역하여 출간하였고. 대구시 사진협회에서 작품활동과 심사를 역임하였으며 영어와 일어, 역사를 비롯해 무엇하나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으로 필자가 대구의 금호호텔의 홍보과 근무 당시 직접 모신 홍보과장님이시도 하였던 그야말로 나의 다섯 손가락에서 벋어날 수 없는 랭킹으로 존경하는 분이시다. “大邱市史“ 에는 대구의 문화유적지와 정치와 행정, 사화, 산업경제를 비롯해 다양한 정보를 검정 분석하여 전 6권이 출간되였다.
_ 역사 소설가이신 박정수 님은 현, 경북중앙뉴스 김현철 대표님의 추천으로 장편소설 "화국"을 만났다. 무려 17권의 장편소설을 집필한 소설가로서 의성 조문국에서 시작한 신라의 ”화랑”보다 훨씬 전에 여성의 막강한 군대 ”원화”를 앞장 세워 전쟁마다 승리의 깃발을 높였다. 그리고 "화국"에서는 삼한시대의 소국들을 소상하게 정리 나열하였고 8세기경 신라의 화랑세기(化郞世起)의 역사서를 연구하여 조문국과 신라의 관계와 국정의 내정을 리얼하게 연출하여 드라마틱하다.
_ 최근에는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경주 여행" (황윤 역사 여행 에세이)에서는 자유롭게 혼자서 시간을 쪼개어 유유자적하며 유적지와 먹거리까지 소개해주는 달콤하고 육각수의 시원한 글을 쓰는 에세이 작가의 글이 독자의 혼을 빼낸다.
_ 어린이들이 읽기 쉬운 “친절한 우리 문화재 학교” 에는 한문의 뜻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풀어 우리 역사와 문화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 “대구지역 임진란사“는 2017년에 506쪽의 (사)임진란문화선양회에서 출간하였는데 조선의 개국 원종공신을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신 최단의 시호는 ”광정”이며 후손인 “최인(공산의병장), 최계(의병가장), 최동보(공산관군장)” 최 씨 삼충은 한 집안에서 숙질 세분이 정유재란시기에 의병활동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는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참고: 임진왜란기 대구지역 의병활동과 그 의의 431~466쪽 장준호)
그리고 최인의 혁혁한 전공을 세워 후일 사헌부지평으로 증직 하였고 충절을 기리는 근본에 보답코자 재실을 팔공산 지묘동 왕건길에 위치한 “원모제”에서 모시고 매년 제를 지낸다.
신라의 건국 신화
진한의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다.
*참고: 여섯 성(六姓)- 정(鄭)씨, 손(孫)씨, 최(崔)씨, 배(裵氏)씨, 설(薛氏)씨
신라의 건국-
신라가 위치하는 서라벌 지역에는 여섯 개의 촌이 있어 육부촌이라 불렸다. 각 촌에는 촌장이 있어 대소사를 관장하였고 6촌장들이 모인 화백회의가 있어 ‘만장일치제’로 6촌 전체의 문제를 결정하였다.
기원전 69년의 화백회의에서 6촌에는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법도를 모르니 임금을 추대하고 도읍을 세우자는 의견이 나와 이에 6촌장들이 산에 올라 서라벌 땅을 굽어보니 남산 기슭의 나정 우물가에 신비한 기운이 서려있어 모두 그곳으로 갔다.
우물가에는 흰말이 있었는데 6촌장들이 나타나자 말은 하늘로 오르고 우물가에는 큰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 알에서 건장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뭇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었으며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6촌장들이 아이의 이름을 박혁거세라 칭하고 왕으로 추대하자, 왕은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고 스스로를 거서간으로 정했다.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된 후 어느 날, 샤량리의 알영 우물가에서 계룡이 나타나 겨드랑이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여자아이는 얼굴이 아름답고 피부가 고왔지만, 입술에 닭의 부리가 달려있어 보기 흉했다. 사람들이 여자아이를 북쪽 시냇가로 데려가 씻기니 부리가 떨어지고 매우 고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아이가 자라 13세가 되어 왕후로 추대되었다. 아이의 이름은 알영이다. 사량리의 알영 우물가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박혁거세와 알영의 나이는 같으며, 나라 사람들이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성인"이라고 부르며 크게 좋아하였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의 경순왕조에 따르면 옛날 중국 연나라에서 마한으로 피난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박혁거세의 선조라고 한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출처:
나무위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었다. 그리고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물리쳤다. 또한, 나당전쟁에서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의 크나큰 땅을 넓혔다.
황금의 나라 신라는 금으로 장식된 유물들로 금관, 금목걸이, 금반지 등을 비롯하여 왕족들의 신분을 과시하고 권위를 상징하는 다양한 장신구들로 찬란한 문화의 부를 상징하였고 미의 극치에 도달하는 금속공예의 기술로 세계에서 뛰어난 예술품임을 자랑하고 있다.
신라불교는 호국불교로 발전시켰고 세속오계와 함께하는 단합으로도 의의를 두었으며 불교문화를 완성하여 믿음과 도를 지켜 민심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부의 화려한 사치는 과유불급을 피해 갈 수는 없었기에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무너지고 마는 비운을 맞게 되었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경주는
1995년에 불국사와 함께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신라의 수도로서 경주 자체가 문화재이자 박물관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선 경주가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특이한 모습이 있다. 국내인은 어떤 배경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나 분주하지만 외국인의 손에는 팸플릿과 필기구로 기록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보다 역사의 유물들에 생각하며 기록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옳고 그런 것이 아니라 관심도와 집중력으로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라 하겠다.
경주의 관광과 유적은 글로 표현하기가 끝이 없으나 학교에서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 모임과 회사 단체여행의 성지로 안 가본사람이 없을 정도이나 경주 남산은 좀 다른 느낌이다. 관광의 구경이라 하기보다 유적지 답사라 해야 될 겄 같다.
남산은
살아있는 천년의 숨결이 살아있는 노천박물관으로서 60여 골짜기에 유적과 유물이 700여 개와 왕릉 7곳을 비롯해 절터는 150여 곳이나 되니 과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최고봉이 494m로서 그리 높지는 않으나 신라인의 불국토를 꿈꾼 영산이다. 좀 더 자세한 관심을 가진다면 “경주 남산 연구소”와 많은 사이트를 살펴보면 좋겠다.
고운 최치원
(崔致遠, 857~ 908 이후) 선생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벼슬에 올라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데 뛰어난 문장력으로 큰 공을 세웠고 신라 말기의 대학자이자 명문장가로서 894년 신라 진성여왕 7년에 당시 사회 문제 해결을 건의한 ‘시무 10조의 개혁안’을 건의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내리고 전국을 유람하다 생을 마쳤다. 정치, 문학, 문화, 사상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여 후대에 많은 교훈과 큰 영향을 남겼다.
현재 우리나라에 최치원의 배향된 서원, 영당, 사우 등을 요약하여 지상 순례해 보면
1.경남 진주시: 남악서원/ 2.전북 정주시: 무성서원/ 3.전북 옥구군: 문창서원/
4.경남 함양: 백연서원/ 5.전북 김재읍: 벽성서원/ 6.경주 서악동: 서악서원/
7.전북 구군: 염의서원/ 8.경북 안동시: 용강서원/ 9.경북 청도군: 학남서원/
10.대구시 달서구: 대곡영당/ 11.경남 마산시: 두곡영당/ 12경북 울진군: 아산영당/
13.전남 광산군: 지산영당/ 14.경기도 화성군: 금산사/ 15.경북 영덕군: 금운사/
16.전북 익산군: 단동사/ 17.충남 서천군: 도충사/ 18.충남 서산군: 부성사/
19.경남 하동군: 운암사/ 20.전북 순창군: 지산사/ 21경기도 포천군: 청성사/
22.경북 경주시: 상서장/ 23.대구시 동구: 구회당/ 24.경남 합천군: 학사당/
25.전북 옥구군: 옥산서원/ 26.전북 옥구군: 현충단/ 27.부산 해운대: 해운정
이상 스물일곱 곳에 봉안되거나 신위가 배향 되어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렇게 많은 곳에 배향된 분은 최치원 선생이 우일무이하다.
(참고: 최상희/상산만록)
-. “호리병 속의 별천지”라고 극찬을 한 “쌍계사”에 직접 쓴 국보인 비석이,
-. 부산의 동백섬 정상에 정자는 “해운정”이며 바로 옆에 최치원 동상이, (해운대의 해운을 정하고 바위에 해운대를 새김)
-. 함양 상림공원 내에 “최치원 역사공원”과 “고운 기념관”이,
-. 광주에는 영조 13년에 지은 사당 “지산재”(芝山齎)가,
-. 정읍에 “피향정”(披香亭)(향기를 나눈다는 뜻의 이름)과 태산사에.
-. (사)경주최 씨 대종회, 전국종친회 최치원 선생 향례, 경주 “상서장”(上書莊)(최치원 선생이 살았던 집)에서 봉행(현, 고운 기념관 건립추진)
-.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의성의 고운사가 있고 고운사 가는 길목에 “최치원 문학관”이 있다. 얼마 전 뼈대만 남기고 불에 타 소실되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 중국에서는 최치원이 당나라 시대에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한 공로와 뛰어난 학식과 공적을 높게 평가하여 2005년에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양저우 당성(唐城) 유적지 안에 “최치원기념관”을 건립했다.
-. 문창공영당(文昌公 影堂) 문화유산/유형유산 대구광역시 동구 도평로 38길 51[도동 766-4]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있는 조선후기 만들어졌던 문창공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영당. [개설] “문창공영당”은 통일신라시대 문장가이자 경주최 씨 시조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영정이 봉안된 곳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영당은 전국적으로 약 20여 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대구광역시에는 동구 도동의 ‘문창공영당’과 달서구 대곡동의 ‘대곡 영당’ 2개소가 있다.
[위치] 문창공영당은 불로시장에서 불로천을 따라 동쪽으로 도동 측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호] 방향으로 1.8㎞쯤 지점에서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면 곧장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문창공 영당’ 이정표 표시를 따라 우측 길로 약 400m쯤 더 가면 좌측으로 “경운재”와 함께 영당이 있다.
[변천] 문창공영당은 1755년(영조 31) 지금 자리가 아닌 인근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에 처음 창건한 계림사(桂林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864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12년에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지금의 자리에 문창공영당을 중수했다.
[형태] 문창공영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단청이 칠해져 있다. 평면 3칸은 모두 통 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가운데 칸의 지붕이 좌우보다 높은 솟을지붕이다. 그 내부도 보개천정 형태를 갖췄다. 내부에 도교의 신선풍으로 묘사된 문창공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현황] 문창공영당 관리는 경주최씨 광정공파 종중에서 하고 있으며 관리 상태는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경주최씨는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자락에 세거하고 있는 주요 토박이 성씨 중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도동의 경주최씨 광정공파 종중의 유적인 경운재, 광정공파 1·2세조 제단, 문창공영당, 구로당 등은 지역의 인물·역사·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문창공영당은 1989년 8월 10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daegu.grandculture.net/daegu/donggu
[참고문헌]『경운재낙성고유첩』관련항목 보기(경주최씨광정공파종중, 1995)
『대구시사(大邱市史)』(대구시사편찬위원회·대구광역시, 1995) 손필헌,『대구의 누정록』(대구중구문화원, 1996)『대구 향맥』(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1999)『대구역사문화』(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2015)
“지혜로운 자는 가난해도 즐거워하고 어리석은 자는 부자라도 걱정한다”라는 명언으로 최치원 문학관 홈페이지에서 문을 열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유명한 명언은 한국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신채호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 말에 현실 앞에서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는지 가슴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경북중앙NEWS_ 편집위원/기자_ 최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