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도에 접어들어 여러 곳을 다녔는데 1월 1일에는 호미곶 해맞이 행사에 첫해의 붉은 해를 맞이했고, 대구 팔공산 자락의 신숭겸장군유적지를 영일대해수욕장과 송도 해수욕장 일대와 형산강 줄기의 마라톤대회 참가를 비롯해 울릉도. 독도 스케치 탐방, 경주의 최부잣집 아카데미와 박물관 신라 금관 전시회, 남산 아래의 삼릉 주변을 둘러보고 황룡사지의 역사관을 답사하고 영해의 괴시리 전통 마을을 마지막으로 찾았다.
요즈음은 무엇보다 장거리 여행의 출발에 앞서 핑계가 자주 따라다닌다. 구름 낀 흐린 날씨와 황사의 미세먼지가 출발 시간을 놓치게 하고 잡다한 일들과 게으름이 덜미를 잡아채어 괴롭힌다.
그러나 마지막이 유혹은 나의 의지를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꼭 떠나야만 하기에...
출발 하루 전 카메라 두 개와 캠을 챙기고 배터리를 충전, 간식과 물, 지갑과 비상약 등을 준비해 놓고는 차편과 시간을 체크한다. 이런 과정은 수련이 잘 되어 있어 척척 차질이 없다.
구룡포에서 터미널까지 40분, 포항에서 영해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달린다. 좌석도 넉넉하여 편안히 이어폰의 음악으로 옛 기억의 추억에 빠져 행복한 여행의 맛을 즐긴다.
자그마한 시골의 영해 터미널에서 괴시마을까지 20분을 걸어 도착 야트막한 산 아래 기와집들이 모여 한 폭의 아늑한 풍경화 그대로이다. 여기저기 추색이 완연한 감나무에 까치 먹이로 몇 개씩을 남겨놓은 다소 을씨년스럽다.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고풍의 전통가옥은 단아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현실의 시각에서 우리의 정서를 녹여주는 깊이에 빠져보는 충분한 매력이 숨어있다.
여기는 대체로 집채의 규모가 다른 민속 마을에 비해 크지 않고 아담한 구조와 총총 붙어 있는 가옥들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대게는 대감집 정도이면 앞마당 옆면에 연못과 정원수들로 조화되어 있고 뒤에는 무예를 연마하는 공터에 대나무와 굵직한 나무들이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여기는 절제된 공간과 넘치는 분을 막고 마치 약속을 한 듯 마을 전체가 잘 정돈된 프로젝트에 의해 욕심이 없는 듯 구성된 느낌이다.
대부분 사람은 집의 소중함에 목숨을 건다. 한국은 유독 집착의 깊이가 하늘을 찌른다. 집값을 다른 데 소비한다고 가정하면 엄청난 시너지의 자산가치를 생성할 것이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이다.
서울에서 내 집을 마련하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전부 모아서 14년이 걸린다고 한다. 거기에다 실제 전국 자가 보유율은 61%정도 나머지는 전세나 월세이다. 이러니 청년들의 결혼에 큰 걸림돌이 작용하기에 비혼이 증가하는 추세가 원인이기도 하다.
삶의 가치가 주거에 치중하다 보니 마치 부의 상징이 되고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주택에 대한 조사통계의 자료는 없지만 기록과 연구에 의하면 거의 토지 소유에 집약되어 있고 주거의 질적 수준은 매우 낮았다는 조사가 있다.
요즈음은, 빈집이 늘어나고 있지만 매매는 없고, 인기 지역은 시세차익으로 부동산 투기가 기성을 부린다. 주택공급은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더니 이젠 미분양 아파트는 늘어나고 있는 심각한 실정에 건설회사의 줄도산에 안타깝기만 하다.
이곳은 영덕(盈德)의 북쪽인 영해면 소재지에서 동북으로 1㎞를 가면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탄생지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들로 고색창연한 영양 남씨 집성촌인 괴시 전통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목은 선생(1328~1396년)이 문장으로서 원(元)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오는 길에 들른 중국 구양박사방(歐陽博士坊)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이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귀국 후 괴시(槐市)라고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고려 말에 함창 김씨(咸昌金氏, 목은 선생의 외가이며, 선생의 외조모는 영양 남씨)가 처음 입주(入住)한 이래, 조선 명종(明宗,1545-1567)년간에는 수안 김씨(遂安金氏), 영해 신씨(寧海申氏), 신안 주씨(新安 朱氏) 등이 거주하다가, 인조(仁祖) 8년(1630년)부터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처음 정착하였다. 그 후 타성(他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영양 남씨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문벌(門閥)을 형성하였다.마을 앞은 동해안의 3대 평야인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山勢)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지형(地形)에 맞추어 대부분의 고택들이 서남향(西南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마을을 가로지르는 기와 토담 골목길을 중심으로 2~3백여 년 된 ''''口''''字形 구조의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어, 영남(嶺南) 반촌(班村)에서도 보기 드문 공간의 모습을 보여준다.괴시전통 마을은 조선 후기 영남 지역 사대부들의 주택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傳承)되고 있다. 또한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槐市派宗宅:경북 민속자료 제75호)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와 전통고가 30여 호가 남아 있어 조상들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는 전통 민속 마을이다. 해마다 학자들과 학생,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며, 격년제로 마을에서는 "목은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출처: https://tour.yd.go.kr/kor/sight/sightView.aspx?idx=242
“ㅁ”자 가옥은 북부지방의 한옥 형태이고 겨울철에 찬 바람을 막아주고 마당을 중심으로 따뜻한 햇볕과 따뜻한 온기를 모아서 보온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여름에는 바람이 잘 통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아마도 마을 앞은 바람이 많은 넓은 평야이고 산 뒤에는 바다가 있고 눈이 많은 추운 기후조건이라 여겨진다.
남부지방은 통풍을 위한 “ㅡ”자 형태, 중부지방은 “ㄷ“자 형태의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 구성을 그리고 “ㄱ”자형 형태로서 기능성을 살려내고 지역적으로 우리나라의 전통 한옥은 특색이 다양하다.
집이란 많은 이야기와 에너지를 자아내는 원동력이자 가족 중심의 가치가 형성되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어른에 대한 예절과 형제애, 기초교육의 산실이자 집단 문화 형성의 좋은 본보기로 성장하는 필수적인 인간애가 담겨 있는 소중한 장소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배산임수의 명당을 찾았는가 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 집 걱정 안 하고 사는 날을 기대하며 이름도 특이한 괴시마을에서 해가 서쪽 들녘을 넘어가며 손을 흔들 때 발걸음은 왔던 길을 다시 즐거운 나의 집으로 향한다.
경북중앙NEWS_ 편집위원/기자_ 최상철